저녁 여덟 시. 현관에 벗어둔 신발 두 켤레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
남편(신발을 바로 세우며) 이거 몇 번을 말해야 돼?
아내……뭘?
남편신발. 매번 이렇게 놔두잖아. 내가 치우는 사람이야?
아내갑자기 왜 그래. 방금 들어와서 벗어둔 거야.
남편갑자기가 아니지. 계속 그랬잖아.
아내(잠시 보다가)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남편회사 얘기가 왜 나와.
아내아니, 신발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낸 적 없잖아.
남편(말이 막힌다) ……별일 없었어.
남편은 그날 오후 회의에서 자기 이름으로 나간 보고서를 두고 팀장이 다른 사람 공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지하철에서도, 편의점에서도 그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현관에서 신발을 보는 순간, 뭔가가 훅 올라왔다.
아내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남편(한참 있다가) ……모르겠어.
들여다보기
화를 못 내는 사람을 두고 흔히 “성격이 순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상담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의 표현은 조금 다릅니다. “화가 안 나는 게 아니라, 낼 자리를 못 찾겠어요.”
감정은 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낼 수 없는 자리에서 눌린 감정은 대개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치(displacement)라고 부릅니다. 팀장에게 낼 수 없었던 화가,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 앞에서 신발 두 켤레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 화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화를 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몸이 먼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그 화를 받습니다.
이런 패턴의 밑에는 대개 하나의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면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것. 언제 그렇게 배웠는지는 본인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화를 냈을 때 분위기가 얼어붙거나 상대가 등을 돌리는 장면을 몇 번 겪고 나면, 화는 감정이 아니라 위험 신호로 저장됩니다.
그래서 참습니다. 관계를 지키려고 참는 것인데, 참는 동안 자기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자리에서, 다른 얼굴로 나옵니다. 현관의 신발 두 켤레 같은 것이 그 얼굴입니다.
감정을 감추는 이유는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감정이 오가지 않는 관계는 오히려 얇아집니다. 서로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모른 채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꺼내는 일이 마음먹는다고 되지는 않습니다. 오래 눌러온 사람일수록 꺼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부터 먼저 계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꺼낸 감정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은 혼자서는 만들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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