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가상 대화 장면입니다. 실제 내담자의 사례가 아니며, 이해를 돕기 위해 구성한 상황입니다.
저녁 일곱 시. 식탁. 아버지, 어머니,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앉아 있다. TV 소리만 흐른다.
아버지:오늘 학교는.
아들:(고개를 들지 않고) 그냥요.
아버지:그냥이 뭐야, 그냥이. 물어보면 대답을 좀 제대로 해.
아들:……갔다 왔다고요.
아버지:저 말투 봐라. 아빠가 지금 뭐 잘못 물어봤어?
어머니:여보, 얘 오늘 시험 봤어. 피곤해서 그래.
아버지:피곤한 건 나도 피곤해. 애가 저렇게 대답하는 게 정상이야?
어머니:(아들 쪽으로) 아빠가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거잖아. 한마디만 해드려.
아들:(수저를 내려놓는다) ……잘 봤어요. 됐죠.
아버지:됐죠? 지금 아빠한테 됐죠라고 했어?
아들이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힌다. 잠시 침묵.
아버지:(어머니에게) 당신이 저렇게 감싸니까 애가 저러는 거야.
어머니:내가 언제 감쌌어. 밥상에서 좀 조용히 넘어가자는 거지.
아버지:조용히 넘어가서 지금 이 꼴이 된 거잖아. 아들이 아빠랑 말을 안 하는데.
어머니: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매일 저 사이에 껴 있어.
어머니는 닫힌 방문을 한 번 보고, 다시 식탁을 본다. 아들 밥그릇에는 밥이 절반쯤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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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탁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지만,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오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말은 어머니를 거쳐 아들에게 가고, 아들의 대답도 어머니를 거쳐 아버지에게 갑니다. 어머니는 통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빠가 궁금해서 물어보시는 거잖아"라는 말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말투를 다시 번역해준 문장입니다.
가족을 하나의 관계망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이런 구조를 '삼각화(triangulation)'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올라가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제3의 인물을 끌어들여 그 긴장을 나눠 지려 합니다. 세 사람이 되는 순간 압력이 분산되기 때문에, 당장의 식탁은 조금 덜 위태로워집니다. 이것은 누가 잘못해서 생기는 일이라기보다, 긴장을 견디려는 관계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완충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 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직접 말을 걸어볼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대답이 아니라 어머니가 정리해준 설명을 듣고, 아들은 아버지의 말이 아니라 어머니가 다듬어준 문장을 듣습니다. 통역이 매끄러울수록 두 사람 사이의 직통 회선은 점점 녹슬어 갑니다. 그리고 그 회선이 녹슬수록, 어머니가 빠질 수 있는 자리는 더 좁아집니다.
세 사람이 보는 장면도 서로 다릅니다. 아버지에게는 관심을 표현한 질문이, 아들에게는 하루를 평가받는 절차로 들립니다. 아들에게는 최소한의 방어인 짧은 대답이, 아버지에게는 자신을 밀어내는 신호로 읽힙니다. 어머니에게는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한마디가, 아버지에게는 편들기로, 아들에게는 또 하나의 요구로 도착합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데, 세 선택이 맞물리는 순간 식탁은 늘 같은 방식으로 끝납니다.
이런 구조가 까다로운 이유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어느 꼭짓점에 서 있는지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상대의 태도뿐입니다. 그래서 대화의 소재가 성적이든 휴대폰이든 진로든, 도착하는 자리는 늘 비슷합니다. 이 삼각형은 안에서 자기 모습을 보기 어렵고, 밖에서 함께 그림을 그려봐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