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가상 대화 장면입니다. 실제 내담자의 사례가 아니며, 이해를 돕기 위해 구성한 상황입니다.
민서(배를 손으로 누르며) 엄마, 나 배 아파.
어머니또? 어제도 그랬잖아.
민서진짜야. 아까부터 계속 이래.
어머니지난주에 병원 가서 다 검사했잖아. 아무 이상 없다고 했고.
민서…….
아버지(신문에서 눈을 떼며) 학교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민서아니라고.
아버지그럼 아침만 아픈 건 뭔데. 어제 주말엔 멀쩡하게 놀았잖아.
민서(자리에서 일어서며) 됐어. 그냥 갈게.
어머니앉아. 밥은 먹고 가야지.
민서안 먹어. 먹으면 더 아파.
어머니그럼 약이라도.
민서약 먹어도 똑같아.
어머니(잠시 보다가) 민서야, 학교에서 무슨 일 있어?
민서없어.
어머니진짜 없어?
민서없다니까. 왜 자꾸 물어봐.
아버지봐라. 아무 일도 없다잖아. 그냥 꾀부리는 거야.
민서(가방을 메며) 나 늦었어.
어머니민서야.
현관문이 닫힌다. 식탁 위에 손도 대지 않은 밥그릇이 남아 있다.
어머니(혼잣말처럼) …저러다 또 점심때 보건실 간다고 전화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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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세 사람은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지각과 결석 일수를 보고, 아버지는 꾀병인지 아닌지를 보고, 민서는 자기 배를 봅니다.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는 결과는 “아프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민서가 느끼는 통증은 실제로 존재하는 감각입니다. 다만 그 통증의 출발점이 위나 장이 아닐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신체화(somatization)는 말로 처리되지 못한 감정이 몸의 감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청소년기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능력이 아직 자라는 중인 시기입니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 교실에 들어가는 게 무섭다”는 문장보다 “배가 아프다”는 감각이 먼저 도착합니다. 아이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것을 문장으로 바꿀 도구가 없는 겁니다.
통증이 나타나는 시간에 규칙이 있는지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등교 직전, 일요일 저녁, 특정 요일 아침. 몸이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쪽은 “더 큰 병원에 가보자”며 몸을 계속 검사하고, 다른 한쪽은 “꾀병”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서로 반대편에 선 것 같지만, 두 해석은 같은 결과를 만듭니다. 아이가 혼자 남는다는 것입니다. 아픈데도 아프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면, 아이는 점점 통증을 말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신호도 사라집니다.
이 구조는 가족 안에 있는 사람이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누구도 잘못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성실하게 챙기고 있고, 아버지는 나름의 판단을 하고 있고, 민서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데도 아침마다 같은 장면이 반복될 때, 그 반복을 밖에서 함께 봐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