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가상 대화 장면입니다.
책상에는 교과서가 펴져 있고, 지수는 벽을 보고 있다. 엄마 미란이 들어온다.
미란 "지수야, 숙제 다 했어?"
지수 "어? 아니… 아직."
미란 "또 딴청이지." (돌아서며 혼잣말로) "애들이 크면 다 그렇지 뭐. 나도 저 땐 그랬어."
아빠 철수가 메모지를 들고 있다. 미란은 부엌을 정리 중이다.
철수 "여보, 지수 선생님이 또 전화하셨네.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하고 자꾸 돌아다닌다고…"
미란 (손을 멈춘다) "바쁘신 분이 별걸 다. 그냥 애가 활발한 거잖아. 당신이 전화해."
철수는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지수가 숙제를 붙들고 앉아 있다. 문제를 읽고, 다시 읽는다.
지수(속으로) '이게 뭐였지. 아, 왜 생각이 안 나. 집중해야 하는데.'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지수가 옆 아이를 밀친다.
친구 "야, 왜 밀어!"
지수 "나도 몰라. 그냥 손이 먼저 나갔어. 난 어쩔 수 없어. 나 ADHD래."
친구들이 공을 차고 논다. 지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본다.
지수(속으로) '어차피 난 뭘 해도 안 되는데. …나도 잘하고 싶은데.'
들여다보기
이 장면에서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아이의 산만함입니다. 그런데 조금 물러나서 보면, 산만함 주위에서 같은 동작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각자의 방식으로 그 질문에서 비켜서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불편한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방식으로 불안을 낮추는 것을 인지적 회피라고 부릅니다.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알고는 있지만 초점을 흐려두는 쪽에 가깝습니다.
미란의 "크면 다 그렇지"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잘 듣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이 놓이는 순간, 지수의 이야기는 아이들 일반의 이야기로 바뀌고 더 물어볼 것이 없어집니다. 선생님 전화를 남편에게 넘기는 것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회피는 대개 이렇게 조용하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옵니다.
아이 쪽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지수가 꺼낸 "난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은 방패에 가깝습니다. 혼나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왜 그랬는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방패는 바깥만 막아주지 않습니다. 운동장에서 지수가 "어차피 난 뭘 해도 안 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신에게도 향합니다. 잠깐 편해지려고 든 것이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산만해 보이는 모습 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며 커진 부담일 수도, 또래 사이에서 겪는 일일 수도, 집 안의 긴장을 아이가 먼저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지수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고, 회피는 정확히 그 시간을 미룹니다.
회피가 어려운 것은, 하고 있는 사람 눈에 가장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미란도 지수도 자기가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서 초점이 흐려지는지는 대체로 옆에서 함께 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드러납니다.
대면 및 화상으로 진행합니다.